Never ever give up
노무현 본문
[1946. 8. 6~2009. 5. 23]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5학년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때에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작문에 대해 ‘백지동맹’을 주도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였다. 합격하고 나서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또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 시절 원주의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에 고향 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 결혼을 했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이는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게 되었다.
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렸고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행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우조선의 이석규 씨가 파업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일이 발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측의 편에서 상담을 해주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구석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의 개업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에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의 허삼수씨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정개하였는데,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 정주영, 장세동 씨 등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었다. 이는 노무현을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는 기반이 되었으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소야대를 뒤엎고 지역분열을 조장하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노무현은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일관되게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년 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키게 되었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활약한다.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대의를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이후 낙선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도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92년 12월의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서는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1993년에 노무현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고집해 명칭 속에 들어간 ‘실무’라는 단어가 뜻하듯이 이 연구소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정치인의 계보 사무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풀뿌리민주주의의 기본을 세우고 지방화시대의 개발전략을 연구하는 명실항부한 연구소로 활동했다. 이 연구소는 오늘날 지방시대의 주역이 된 인재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대통령 선거 공약이 되었던 지방화시대의 발전전략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
다.
노무현은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동시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당시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도 우위를 보였고, 조순 서울시장후보가 부시장으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지만, 이를 단념하고 다시 부산에 도전했던 것.
선거초반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김대중 총재의 사실상 정계복귀와 지역등권론 등의 역풍으로 최종적으로는 낙선하고 말았다.
95년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고 나서도 노무현은 민주당을 지켰다. 이후 96년 1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 김원기) 활동을 하다가 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통추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11월에 ‘정권교체’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대선 기간동안 시청률 1위의 TV찬조연설을 하여 국민의 정부 탄생에 기여를 했다.
98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갈등의 현장에 적극 나서서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활동은 98년 8월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의 건, 99년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 중재의 건 등을 들 수 있다.
99년 초 다시 지역갈등을 악용한 집회가 이어지자 노무현은 다시 종로 지역구를 포기, 부산행의 결단을 내렸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많은 지지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여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정했다. 노사모의 자발적인 태동은 국민참여를 통한 정치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게 했다.
2000년 8월에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노무현은 경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의 수평적 토론문화 확산, 다면평가등 인사평가 시스템 등을 만드는데 주력해 공직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으로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무현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의 선거운동 방식은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 가신, 계보, 측근 없는 정치를 펼쳐 온 노무현은 국민이 후원금을 내고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카드결제, 휴대폰모금, 희망티켓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진행된 모금 행사는 기존의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뛰어 넘었으며, 미디어선거, 인터넷선거, 정책선거의 원칙과 결합돼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선거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결국 노무현은 48.9%의 지지를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낸 국민의 승리이며 쾌거이다.
(당선소감)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신 민주당 당원 동지 여러분,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거듭거듭 감사드린다. 저의 당선을 위해 뛰어주시지 않은 분들이나, 저를 반대한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으로,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출처) 사람사는 세상(http://www.knowhow.or.kr)
ps.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대통령 영결식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